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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참혹한 머리의 주인은?
레벨 M 관리자
조회수 : 2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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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5월 17일.


조선총독부가 대한제국을 지배한지 23년 째 되던 해에 죽첨정(竹添町. 지금의 서대문구 충정로 3가) 쓰레기 매립지에서 종이와 치마폭에 싸인 1~2세 가량 아기의 머리가 발견된다.

 

1933년 05월 17일 동아일보 기사
 "마포선 전차길에서 현장으로 가는 길에는 방울방울 피가 흘러 있고 현장에는 아직도 새빨간 피가 흥건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더욱이 어린애가 남녀를 분간할 수 없고 검은 머리통만 남아서 조사하는 경관들도 머리를 흔들었다."

 

더욱이 현장엔 뇌수가 흩어져있고, 아기의 골을 파낸 흔적이 있어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당시 경성은 조선총독부가 치안유지 100%를 자랑하고 있던 터라, 이런 해괴망측한 범죄가 일어나자 서대문 경찰서는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경찰견을 투입해보니 경찰견이 전차선 바깥으로는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의 소행으로 의심할 뿐 전혀 수사에 진전이 없었다.


별다른 단서가 나오지 않자, 서대문 경찰서는 의심되는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해서 자백을 받아내려 고문하고 괴롭히기 시작한다.


한센병, 즉 살이 썩어 들어가는 문둥병 환자들에게 아이의 간이 좋다는 말들이 돌았기 때문에 한센병 환자들의 소행이라 생각하고 근방의 환자들을 모두 잡아다가 조사하기도 했다.

 

1933년 5월 18일 동아일보
 "유아의 단두사건 아직도 정체묘연.
문둥이, 용병장이의 짓이라면,
아이 잃은 부모의 수색청원이 있을 텐데 며칠 안으로는 그런 일이 없다하고.
제 자식을 제가 죽였다 하기에는 상식으론 믿기 어려운 일. (중략)
항간에 돈으로 아이를 사고 파는 일이 있는데
이런 아이를 직업적으로 죽이는 자가 있을리 없을 테지만 혹여 그런 자들의 소행일까."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경찰서에 들락거리며 취조를 당하는 동안, 서서히 한가지 의문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아기의 머리는 살았을 때 잘린 것인가, 죽은 후에 잘린 것인가?

 

1933년 6월 5일, 경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근처의 공동묘지를 전부 뒤지다가, 머리가 없는 여자아이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아기머리에 이 시신이 부합할 것인가를 판명하기 위해 부검을 해보았다.

 

부검 결과 아이의 몸과 머리가 동일인물이었다.

 

그로부터 수사는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아기가 살던 집에 겻방살이를 하던 배구석이란 사람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체포된 지 3일 째 되던 날, 배구석은 드디어 범행 일체를 자백했고, 그의 진술로 인해 윤명구라는 사람이 공범으로 함께 체포되었고,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1933년 6월 8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윤명구의 사주를 받고 배구석이 이런 끔찍한 범죄를 감행하게 된 것은, 간질병으로 오랫동안 신음하던 윤명구의 아들 완구에게 어린아이의 골수에 있는 뇌장이 약이 된다는 미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윤명구는 늘상 어린아이의 뇌수를 구하던 참에, 배구석의 주인집 딸인 한 살배기 기옥이가 5월 10일에 죽은 것을 알게 된다.

 

윤명구는 배구석을 잘 알던 터라 자기 요구만 들어주면 장래의 생활을 보장해 주겠다고 하며, 죽은 아이의 뇌수로 자기의 병신 자식을 고칠 수 있으면 얼마나 큰 은혜냐며 설득했고, 배구석은 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체포 뒤, 배구석의 처는 그가 왜 잡혀갔는지도 몰라 몇날 몇일을 경찰서 앞에서 울며 사정했다.

 

놀라운점은 무덤에서 죽은 아이의 시체를 꺼내 목을 잘라다 뇌수를 꺼내 먹이는 짓을 저지른 배구석은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는 '술 한잔 못 먹는 얌전한 사람' 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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